아이의 정서지능 계발을 위한 가정교육에 관하여
[교육플러스] 누구나 자녀를 키우면서 좋은 부모가 되고자 한다. 좋은 부모란 어떤 사람인가? 한 마디로 자녀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아이의 마음이 어떤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눈빛 하나로도 알아채는 부모라면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부모다.
그러나 이는 말처럼 쉽지 않다. 자기 자신조차 잘 파악하기 힘들 때가 있다. 때로는 정말로 자기가 낳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힘든 아이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아이의 마음을 바로 읽을 수 있을까?
코로나19 위기가 장기간 계속되면서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관계 맺기가 어려운 아이들로 인해 어려움을 호소하는 부모들이 많다. 아이들이 우울증에 빠져 정서적인 극복이 필요한 경우가 갈수록 늘어가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성장의 과정과 코로나 시기가 겹치면서 이미 깊어진 상처가 그들 내면의 많은 잠재력을 포위하고 있다. 아이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먼저 아이가 살아갈 전체의 삶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요즘 고등학교는 자퇴생이 많이 늘고 있다. 그 이면에는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듯이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해 힘들어하는 부모들의 호소가 지배적이다.
심지어 아이의 자퇴 요구에 시달리던 어느 부모는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야~”를 외치며 협박하는 아이에게 “더는 시달리고 싶지 않다”고 두 손을 들고 자퇴 동의서에 기꺼이 도장을 찍어 주기도 한다. 문제는 학교에서의 학업숙려제 기간조차 거치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이의 가정교육에 큰 변화가 일고 있다. 과거에는 부모가 아이의 인지능력에 관심이 높았다면 이제는 정서적인 면에 주목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이의 정서는 그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서란 무엇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바람직한 정서지능은 무엇을 통해 어떻게 형성될까? 이에 대해 교육적인 고찰을 해 보고자 한다.
아이들은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모두 다르다. 정서지능은 타고난 아이들의 기질보다 부모의 돌봄과 교육을 통해 발달한다. 일반적으로 기질은 성향과 특성을 갖추고 여러 종류로 구분될 뿐이지, 좋고 나쁜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예컨대 원석과 같다. 저마다 강도도 다르고 색도, 밝기도 다르다.
이때 부모의 말은 원석을 빚어내는 도구이다. 말이야말로 효과적인 가정교육을 위한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도구다. 부모의 말에 아이들은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자신감과 용기를 갖고 살 수 있도록 부모들은 말이란 도구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심리학자인 정윤경 교수의 『고마워, 내 아이가 되어줘서』에 의하면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말의 활용이 가장 효과를 거두는 두 시기가 있다. 부모가 많은 신경을 쓴다면 정서지능이 가장 효율적인 시기인 만 3~5세 취학 전과 사춘기가 그것이다.
이런 예민한 시기에 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말은 아이의 성격을 만들어가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이자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이끄는 통로다. 이때 정서지능과 자율성이 확연히 달라진다. 위의 자퇴 사례처럼 아이가 극단적인 상황까지 언급하며 부모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자녀교육에서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모의 잔소리는 대화를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중요 요인이라는 점이다. 흔히 아이는 마음의 문을 닫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우울증은 여기서 발생한다. 그 결과는 매년 OECD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의 최상위를 기록하는 데 일등 공신이다. 물론 그 밖의 다양한 원인(예컨대 성적, 교우관계 등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모와 아이의 소통이 원활하다면 이를 방지할 수 있다. 여기서 소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이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감정의 주고받음이다. 그렇다고 대화를 많이 한다고 소통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말이 잔소리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의 말이 매우 중요하다.
부모들이 무심코 많이 쓰는 말, 즉 잔소리가 되는 경우를 살펴보자. ▲도대체 너는 잘하는 게 뭐가 있어? ▲이것 밖에 못하겠니? ▲이 바보야 ▲너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정말 이제 널 포기했다 등등. 이들의 공통점은 부모의 감정이 폭발하여 조절을 잘못한다는 것이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목적에 맞게 잘 활용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결국 목적을 망각한 이 말들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부모도 사람인지라 감정에 많은 종류가 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다. 좋은 감정은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된다. 여기엔 많이 웃고 많이 안아 주는 스킨십이 필요하다. 또한 좋은 감정을 담은 눈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부정적인 감정도 필요하다. 다만 이런 감정은 솔직하게 표현하고 잘 다스려야 아이의 삶에 도움이 된다. 예컨대 마트에서 뛰어다니는 아이에게 “뛰지 마. 뛰면 혼내줄 거야”라고 부정적 감정을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나와 손잡고 걸어 다닐래? 아니면 카트에 앉아서 편하게 있을래?"라고 묻고 아이에게 선택을 제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엔 아이에게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교육이 함께 한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다가가기 위한 말로 부모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여기엔 다음과 같은 말을 고려할 수 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좋지 않아 답답하고 속상하지? ▲성적이 당장 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네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 것은 아니야. 지금 당장은 네가 노력한 게 눈에 띄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남아서 반드시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널 도와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해주면 내가 같이 노력할게.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 저변에는 아이가 위로와 공감을 얻고,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겨도 자기감정을 조절할 능력이 생기며,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나가게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이를 죽이는 잔소리는 어떤 것일까? 부모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아이의 말을 일방적으로 끊고,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고, 일방적으로 명령을 하는 경우다.
우리나라 아이들의 정서지능이 다른 나라의 아이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은 부모들이 무조건 통제하려고 하고 아이를 잘 안다고 착각해 잘못된 잔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의 분석 비교에서 밝혀진 바 있다.
대부분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잔소리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밑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면 아이를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 부모로서의 자존감 부족, 아이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마음이 존재한다. 곧 부모의 애착이 집착으로 변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우리는 자녀교육에서 아이의 모든 것이 부모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꿔야 한다. 아이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즉, 아이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 사회에 크게 문제가 되는 마마보이를 예방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럼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 정윤경 교수는 다음의 방법을 순차적으로 실천해 보기를 권하고 있다. ▲부모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기 ▲아이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아이가 먼저 말하고 표현하게 하기 ▲최대한 짧게, 한 번에 하나씩,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기 ▲아이에게 해야 할 것 위주로 대안을 주고 선택하게 하기 ▲아이의 특성과 눈높이에 맞추어 이야기하기 등이다. 이를 위해선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실시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서두에서 말한 좋은 부모 되기가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자녀교육을 말할 때 지칭하는 ‘자식 농사’의 보람과 행복감은 어려서부터 아이의 발달 상황-유아기, 이동기, 사춘기 등-과 심리적 특성에 맞춰 대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성별-남, 녀-에 따른 접근법도 달라야 한다. 일반적으로 여자아이는 관계 지향적이고 남자아이는 과업 중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전자는 “네가 그렇게 하면 동생 기분은 어떨 것 같아?” 후자는 “퍼즐을 이렇게 잘 맞추었구나. 세밀하게 잘 만들었고 아이디어가 정말 좋구나”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아이의 행복과 성공을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무조건 잔소리를 하면서 최선을 다한다고 말하기 전에 부모가 원하는 목적을 좀 더 현명하게 실천하는 가정교육이 중요하다. 잘 기억하고 연습하고 반복하면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더 좋아질 수 있다. 소통은 기다림이고 인내다. 우리는 말로써 아이를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모가 행복하고 건강해야 아이가 정서적으로 행복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정서지능 계발은 부모의 행복에서 출발하며 이를 일상에서 느끼는 아이는 그 행복의 기운을 자신들에게도 품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는 부디 이 점을 기억하고 아이와 더불어 내면의 행복을 찾는 일에 일상적인 습관화가 우선이어야 한다.
이는 오랫동안 학교에서 바람직한 정서를 소유하도록 아이들을 교육하고 가정에선 두 아이를 원만하게 키워 독립시킨 필자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가 명작 『안나 카레리나』에서 피력한 것이기도 하다.
“행복한 가정은 이유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그 이유가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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