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플러스] 의료인이라면 한 번쯤 접하게 되는 의료윤리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이론을 간략히 소개한다. 여기서 다루는 생명 의료 윤리의 네 가지 원칙은 미국의 생명 의료 윤리학자 비첨과 칠드레스(T. L. Beauchamp &J. F. Childress)가 그들의 저서『생명 의료 윤리학의 원리 Principles of Biomedical Ethics』에서 제안한 생명 의료 윤리학 방법론이다. 이를 흔히 원칙주의라 부르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하향적 접근법에 속하면서도 그것을 좀 더 구체화시킨 방법이다. 전통적인 하향적 접근법은 대체로 하나의 궁극적인 도덕 이론을 내세우고 그 하나의 이론으로 모든 의료 윤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반면 원칙주의는 네 가지 원칙을 구체적인 의료 윤리 문제에 적용시켜 도덕적인 답을 찾아 나가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네 가지 원칙이란 자율성 존중의 원칙, 악행 금지의 원칙, 선행의 원칙, 정의의 원칙이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이번 시간에는 지난번 칼럼에서 소개드린 4가지 의료윤리 원칙 중 3번째와 4번째 원칙을 소개드립니다.

(3) 선행의 원칙

선행의 원칙은 악행 금지의 원칙을 넘어서 해악의 예방과 제거 및 적극적인 선의 실행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악행을 저질러서는 안 되지만,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래서 특정 관계에 따른 차별적인 선행이 허용됩니다.

학자들은 과연 이런 선행이 도덕적 의무에 속하는가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사의 특수성을 들어 대부분 나라에서 응급 환자를 치료하지 않은 의사는 부도덕한 인간으로 지목되고 형사책임을 지기도 하며, 심지어 의사에게는 진료를 거부할 자유조차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의사는 선행의 도덕적 의무를 지닐까요? 지닌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일반적 선행은 호혜성에 근거를 둡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특정의 선행, 특히 의사에게 요구되는 선행의 의무는 의사와 환자의 계약에 따라 성립하게 됩니다. 환자가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겠다고 할 때, 이미 그 속에는 의사가 환자에게 선행을 베풀 의무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디까지가 의사의 역할에 따른 의무이고, 어느 한계를 넘어선 행위가 그 이상인지를 판가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선행의 원칙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온정적 간섭주의(paternalism)입니다. 온정적 간섭주의란 부모가 자식의 행복을 위해 좋은 것을 사용하듯이,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타인의 선을 증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정적 간섭주의가 성립되려면 우선 무엇이 당사자에게 선이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일반적으로 삶의 질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기 암 환자의 경우, 선행의 원칙은 무엇을 요구할까요? 적극적 안락사를 시키는 것은 선행의 원칙에 맞을까요? 자살하도록 도와 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일까요? 이러한 물음들은 인간의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삶의 질을 참작한 생명을 염두에 둘 때 그리 쉽게 답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온정적 간섭주의에 근거를 둔 선행의 원칙은 무엇보다 자율성 존중의 원칙과 상충된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자율성과 관련하여 온정적 간섭주의는 약한 형태와 강한 형태로 구분됩니다. 전자는 환자가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한 환자의 이익을 위해 간섭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후자는 환자가 반대한다 해도 환자의 이익을 위해 간섭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하나의 의료 행위가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온정적 간섭의 정당화가 달라진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대략적인 기준조차 없으면, 온정적 간섭이 임의적으로 되어서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생명 의료 윤리학의 원리' 저자 Tom Beauchamp와 James Childress(사진=https://1000wordphilosophy.com/)
'생명 의료 윤리학의 원리' 저자 Tom Beauchamp와 James Childress(사진=https://1000wordphilosophy.com/)

(4) 정의의 원칙

정의는 흔히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형식적 정의에 불과해서 우리에게 아무런 지침을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결정하는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겠죠. 이를 실질적인 정의관이라고 부릅니다. 전통적으로는 성과에 따른 분배, 능력에 따른 분배, 노력에 따른 분배, 필요에 따른 분배 등 네 가지 기준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의료 자원의 분배는 어떤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까요?

의료계에서 말하는 의학적 유용성이란 일종의 성과에 따른 분배를, 사회적 유용성은 능력에 따른 분배를 의료 관행에 각각 적용시킨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네 가지 분배 기준을 모두 고려한다면 어느 기준에 우선성을 둘 것이며, 종합적인 계산 방법은 어떻게 될까요?

이에 대해 윤리학의 여러 이론이 각자의 계산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리주의 이론은 공공의 이익과 사회 총효용을 극대화하도록 분배할 것을 제안합니다. 자유주의는 소유권과 자유권을 보장하며 각자의 건강을 스스로 보호하며 보건의료의 분배를 시장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봅니다. 공동체주의는 한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는 정의의 원칙과 관행을 중시하고, 개인과 공동체 상호 책임과 연대성을 강조합니다. 평등주의 의론은 존 롤스에 의해 제시된 이론으로 보건의료 분야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본적 자유를 보장하고, 선천적 또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익을 동등하게 분배했을 때보다 불평등하게 분배했을 때 더 많은 이익을 얻을 경우에만 불평등이 허용될 수 있습니다.

보건의료에서 인종, 민족, 성차별의 문제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의료를 받을 권리가 정의의 원칙에 근거해 논의되고 있습니다. 또한 의료자원의 배분에서 할당하기, 순서 정하기,우선권 설정하기 등이 정의의 실제적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회에 최대 이익을 가져오도록 배분하는 공리주의적인 접근과 함께, 불리한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필요한 의료자원의 평등한 분배를 추구하는 평등주의 접근을 고려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윤리는 사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당위를 다루기 때문에 당위라는 잣대가 없다면 의료 행위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진찰과 치료 역시 인간 생명과 신체를 다루는 행위이기에 우리는 윤리를 무시할 수 없다. 지금까지 다룬 네 가지 윤리 원칙은 비록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지만, 의료 행위를 평가하는 윤리적 기준으로 꼭 필요하고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하는 교양상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송민호 칼럼니스트
송민호 칼럼니스트

송민호는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해군사관학교 사회인문학처 교수,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연구원을 거쳐 현재는 서울대 벤처 휴먼디자인랩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각 분야에 깊은 전문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기획력과 판단력이 빠르고 정확하며, 추진력이 강한 것이 장점이다. 칼럼니스트로 독자들에게 유익하고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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