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플러스]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실천하며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기 위해 연구하는 교사들이 있다. 이들은 교육과정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지만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공존하며 다채로운 빛깔을 뿜어낸다. 학교에서 이들이 뿜어내는 빛깔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교육플러스>는 ‘교육과정디자인연구소’ 회원들의 눈과 목소리로 담아내는 교육활동, 교육과정, 수업, 학교문화, 그리고 개인적인 고민과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다르지만 같은 교사들의 일상을 공감하며 동행하길 기대한다.
[교육플러스] 가을입니다. 나무들은 열매와 잎을 떨구어 냅니다. 선생님과 함께 했던 점심 산책 시간엔 지난 주말 장거리 라이딩 얘기도 많이 했지만, 학교와 학생, 그리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생명과학을 전공하신 선생님께서는 학문 그 자체를 진심으로 사랑하셨고, 늘 연구하시는 분이셨어요. 수업을 마치고 난 후에도 교실과 복도에서 학생의 질문에 답하고 다음 수업 시간 종이 울리면 곧바로 교실로 들어가는 일은 일상이었지요.
그러고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학부 시절의 전공 서적이나 영어로 쓰인 최근의 연구 논문들을 다시 읽어 정리하고 조금이라도 잘못 가르친 내용에 대해서는 전체 학생들 앞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이 많은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듯도 합니다. 아니, 그것은 용기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수업을 학생과 함께 탐구하고 연구하는 과정으로 보았던 선생님의 관점에서는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었겠다고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많은 학생들이 생명과학이나 의학 분야 연구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겁니다.
선생님께서 먼 길을 떠나신 그해 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가 기억납니다.
겨우내 서울의 큰 병원에서 검사와 시술을 받느라 몇 개월 만에 학교에 오신 날이었습니다. 몸에 고무로 된 호스와 주머니를 매달고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오셨다고 했지요.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학교에 온 이유가 지난 학기에 생명과학을 수강했던 학생들의 학생부를 기록하기 위해서였다지요. 의사가 그렇게 만류했는데도, 위험한 일이었는데도, 동료 선생님이 대신 해 줄 수도 있었던 일인데도 며칠 밤낮에 걸쳐 모든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정성스럽게 써 주셨다지요.
장례식장에서 저처럼 많이 울었던 동료 선생님들도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며칠 남지 않았던 삶마저도 기꺼이 내주었던 선생님의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제가 처음 학년 부장을 맡았을 때 당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셨던 일도 기억납니다. 새 학기 준비를 위해 학생들과 함께 떠났던 수련원에서 채 어둠이 걷히지 않은 산책로를 나란히 걸을 때 해 주셨던 말씀들은 이제 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 해 주셨던 격려와 당부를 통해 갖게 된 자신감은 이후 3년간 학년 부장을 맡으면서 든든한 토템처럼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학년 부장 이후 작년까지 ‘교육과정’과 ‘일반고 교육력 도약 사업’, ‘고교학점제’ 업무를 맡으면서도 저는 참으로 선생님을 많이 의지했네요.
학교 교육과정과 교육정책을 수립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타자화된 대상이 되는 것을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고, 교사는 교육과정의 방관자로 서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잖아요.
학생은 교육과정과 수업의 주체이고, 변화되어야 할 대상은 학생이 아니라 교사라고, 그러니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교사는 절대 직장생활만을 해서는 안 된다며, 특유의 웃음소리로 “우리가 돈이 없지 자존심이 없냐”라고 말씀하셨던 선생님은 그렇게 지난 6년 내내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으로 제 곁에 계셨습니다.
하늘이 제법 넓어지면서 산책을 하는 선생님들이 늘어났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걸었던 그 길입니다.
급식소에서 출발해서 등나무 쉼터를 거쳐 체육관을 끼고 계속 걷다 보면, 큰 미루나무들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잎을 떨구는 오르막이 나옵니다. 그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드넓은 운동장과 학교 건물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거기서부터는 너른 평지입니다.
바람도 많이 불어오고 넓고 푸른 하늘도, 상당산도 보입니다. 선생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선생님들까지도 그 산책길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선배들이 걷고 있는 길이기에 올해 처음 부임한 선생님들도 그 길이 원래부터 산책로였는지 알고 즐겁게 그 길을 걷습니다. 원래는 길이 아니었던 길인데 말입니다.
‘열매 맺음’과 동시에 잎을 떨구는 가을은 그래서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생명과학을 가르치시는 선생님께 그 역설의 의미에 대해 묻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그 의미를 알 것도 같습니다. 마지막 이파리까지 떨구는 순간까지도 열매를 맺어냈던 선생님은 지금도 나무가 되어 우리들의 마음에 심겨 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좋은 선생님으로 잘 지내고 있으시죠?
*본 원고는 필자의 교직 생활에서 오래도록 멘토였던 한 선배 교사의 이야기이면서 지금도 힘든 오르막이지만 꿋꿋이 길을 만들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선생님을 모티프로 한 것입니다. 특정 개인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님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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