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플러스] 동양의 진주와 같은 경전 <도덕경>의 56장에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이는 진정으로 도를 아는 사람은 도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어설프게 아는 사람은 함부로 도에 대해 말한다는 의미다. 무위(無爲)와 역설(逆說)로 대표되는 노자 철학의 핵심을 보여준다. 또 다른 도가의 경전 <장자>에서도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성인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침을 베푼다.” 라고 전하고 있다. 장자의 가르침에 의하면 지혜롭고 지식이 많은 사람은 오히려 말을 아낀다. 배움 앞에서 부족한 자신을 알기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가르침은 오히려 역효과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유위(有爲·적극적인 행위)를 지향하는 공자는 말을 통해 가르침을 주려 했다. ‘믿을 신(信)’이 사람(人)과 말(言)로 구성된 것에서 보듯 믿음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논어> ‘이인’ 편에 실린 “옛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는데, 이는 행동이 따르지 못할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군자는 말에 대해서는 모자란 듯하고 행동에 대해서는 민첩하려고 한다.” 등도 모두 말보다 실천이 중요함을 강조한 구절이다. 공자는 “먼저 실천하고 그다음에 말하라”고 ‘위정’ 편에서 더 정확하게 가르치기도 했다. 스스로 먼저 실천한 다음에야 그에 대해 말할 자격이 생긴다는 통렬한 가르침이다. 이는 현대에 와서 인도의 성자 간디의 사상과 행동에서도 ‘언행일치’의 사표가 되어 국민, 특히 국가의 미래 주역인 젊은이들에게 교육적으로 크게 각인시킨 바 있다.
이처럼 모두(冒頭)에서 다소 장황하게 인류의 지혜의 보고인 고전의 가르침을 이어간 것은 이 시기에 매우 절대 절명의 필요성 때문이다. 4·10 제22대 총선을 앞두고서 출사표를 던진 많은 정치인을 국민이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고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에서 진정한 주인으로서 역할을 재조명하고자 함이다.
국민은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사람을 대하는 자를 판단하고 멀리해야 한다. 이는 선거철이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국민은 후보자의 말만 듣고 그를 선택한다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긴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번 직접 경험해 왔다. 이는 현대판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실증적인 교훈으로 다가온다.
매번 선거철이면 다수의 후보자가 비굴할 정도로 아부하고 과도하게 몸을 굽히며 예를 표하지만 그런 행동의 이면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다. 유권자에게 잘 보여 환심을 사려는 의도, 진정한 모습을 감추려는 가식, 실력이 아닌 관계에 의존하려는 얄팍함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에게 이익이 존재할 때까지만 유효기간을 갖는다. 선거 후에 상황이 변해서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즉시 얼굴을 바꾸지 않는가. 우리는 매번 이런 후보에게서 배신을 느끼고 선택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혹자는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는 자학적인 자세로 반성을 표출하기도 한다.
이 땅에 다시금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식적인 선거 활동과 홍보가 시작되었다. 어느 후보와 정당의 지도부를 막론하고 막말이 난무하고 낡은 색깔론이 다시금 등장하여 유권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현혹하고 있다. 아무리 적절한 타이밍에 맞추어 자극적인 상대방 험담과 비방이 선거의 절묘한 책략이라 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지나침은 없는 것보다 못하다.
이제 우리는 선거에서 가장 경계할 것으로 “교묘한 말을 하고 꾸미는 얼굴을 한 사람 가운데 인한 사람이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 라는 한자 성어의 의미를 깊이 음미하고 후보자의 진의와 자질을 올바로 파악하는 날카로운 지혜로 무장할 때이다.
이제 후보자 등록이 마무리되면서 갈수록 22대 총선의 선거판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막말과 선심성 공약,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며 더욱 혼탁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권 심판이냐 정권 지원이냐의 명분으로 또 다른 국민 편 가르기를 한층 부채질할 것이다. 더불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 것이 확실한 각종 선심성 공약이 ‘교언영색’의 본질을 드러낼 것이다. 이는 오히려 미래의 주역인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교육적으로 매우 고약하고 불량한 행위이자 나아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선진 민주주의의 저해 요인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럴수록 우리는 고전 속의 선인들의 가르침이 시대가 변해도 전혀 다르지 않음을 재인식하고 미래 세대들에게 이를 현실에 적용하여 교육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이는 우리가 현재와 미래의 세상을 보다 슬기롭게 사는 지혜와 판단의 단초를 제공하는 매우 소중한 삶이자 민주주의 교육의 가장 큰 교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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